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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설레는 마음_ 이정현

by lucy831 202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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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사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있는 힘껏 사랑하세요.

 

책 속 한 줄, 한 마디.

계절에 설레다

무작정 살아간다는 것

창으로 드는 해에 붉은 빛이 섞이면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걷고 싶어집니다. 나는 무작정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작정된 삶이 어디 있을까요. 사람들은 노을을 따라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는 노을을 담아내는 세상이 노을만큼이나 좋습니다. 노을을 따라 쉴 새 없이 걷다가 한숨 돌리고 세상을 바라본 적이 있으신가요. 종일 꼿꼿하게 서 있던 건물이 그림자를 뉘어놓고 옆의 건물들과 함께 기대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오늘도 잘 살았다, 붉게 오른 벅찬 표정의 건물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중략) 나는 앞으로도 작정하고 삶을 무작정 살아볼 생각입니다. 걷다가 숨이 차고 해가 지는 곳에서 빛나볼 생각입니다. 밤은 기어코 오겠지만 나는 내가 가진 빛으로 그 밤을 견뎌볼 작정입니다. 노을만 좇기에는 삶에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버스 맨 뒷좌석에서 당신에게 기대고 있던 나는 다리가 뜨끈해지고 나서야 햇살 좋은 날이구나 합니다. 간만에 앞서 걷던 당신의 머리칼 냄새가 바람 타고 실려 오고 나서야 비로소 가을이구나 합니다. 커피 가게의 테이블에 엎드려 마주 보다 손목의 초침 소리를 듣고 나서야 시간이 가는구나 합니다. 한쪽으로만 예민한 사랑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둔하게 만드나 봅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멎게 만듭니다. 오늘은 헤어지기 싫은 날입니다.

 

외투 속 가을

가로수의 은행잎이 채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나무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은 두터운 외투를 꺼내 입었습니다. 가을이 채 가지 않았는데 겨울을 찾습니다. 함께 들으려 골라둔 조용한 노래가 요즘 날씨에도 어울리는 건 썩 다행입니다. 기다렸던 가을은 스치듯 지나가지만 나는 다음 계절이 와도 개켜지지 않는 가을의 옷가지가 되겠습니다. 추위가 가시고 나면 봄인 듯 머무르는, 당신에게 오래 머무는 계절이 되고 싶습니다. 외투 속 가을이고 싶습니다.

 

사랑에 설레다

환기

노크 한 번 없이 벌컥 삼킨 사랑이었습니다. 그러곤 비좁은 단칸방을 채운 습기가 가시기도 전에 뛰쳐나간, 헐떡임만 남은 사랑. 당신의 날숨을 채 걸러내지 못한 숨을 뉘어놓고, 닫힌 문 앞에서 오래 들썩였습니다. 기척 없는 문고리를 몇 번이나 눈물로 끌어내렸습니다. 이불을 둘러쓰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다가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습니다. 눅눅한 숨을 뱉어낸 방이 좁은 창을 통해 못내 호흡합니다. 건조한 공기는 시리다가 이내 괜찮아졌습니다. 이불을 개키고 사랑했다, 그래도 사랑이었다, 말해봅니다. 몇 번의 노크가 있었습니다. 문을 열며 사랑한다 말하던 당신이, 이제 기척만 하며 보고 싶답니다. 잘 지내라던 사람이, 잘 지냈느냐고 묻습니다. 그럭저럭이라 답하면, 괜찮다니 다행이다, 다시 답합니다. 잊을 만하면 똑똑, 열어젖히던 문 앞에서 노크만 합니다. 아쉬움이라는 감정에 절박함을 기대한 내가 바보 같습니다. 미련도 사랑이라 믿고 싶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사랑에는 여전히 사랑 대신 헐떡임만 남았을 텐데.

 

끼니

(중략) 오랜만에 목적 없는 걸음을 걸어보기도 합니다. 이끌어야 하는 손도, 따라나서는 걸음도 없습니다. 분주한 거리에 놓인 벤치에 앉아도 보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성급하게 걸어도 봅니다. 그렇게 무언가 해보려고 노력하는 산책이 끝나면 그때는 그저 걷습니다. 오른발이 나가면 왼쪽 무릎이 접히고, 왼발을 디디면 오른발이 들립니다. 그렇게 오래 걷습니다. 두꺼운 코트를 꺼내 입고, 식사로 배를 채웠는데도 여전히 춥고 허기진 것 같습니다. 추위에는 옷을 껴입고, 허기에는 끼니를 때웁니다. 외로움에는 어떨까요. 끼니처럼 사랑으로 때우면 되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이번 겨울은 많이 춥다지만, 따스했던 지난 겨울의 끝이 많이 시렸던 터라 올해는 반대로 살아낼 만도 한 것 같습니다. 돌아서는 길이 낯설지 않습니다. 많이 외로웠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한창의 봄

(중략) 한창의 봄은 벚꽃이 다 지고 나서 시작된다는 걸 사람들이 알까요. 벚꽃이 지기 시작하면 시선이 조금 어지러워집니다. 갈색 꽃받침이 어른거리는 벚나무를 보다 입술을 삐죽이며 시선을 돌립니다. 작은 바람에 떠다니는 꽃잎들 사이로 걷다 보면 꽃비에 젖기도 합니다. 그 덕에 다시 고개를 들어 이번에는 다른 가로수도 봅니다. 은행나무는 가을만 사는 줄 알았더니 봄이 오니 어린 초록잎이 잔뜩 피었습니다. 노랗고 파삭한 은행잎 대신 봄을 머금은 연두색 잎들이 돋아나 있습니다. 거리의 여기저기에서 봄이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잔잔히 들립니다. 한창의 봄에는 낙엽수마저 봄을 피워냅니다. 오늘은 온통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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